19. “수장, 안유담은 아무래도 살려두심이 좋을 듯합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해문은 윤오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윤오 역시 발을 멈칫하며 멈춰 선다. 해문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아랫입술을 작게 말아 물었다 놓았다. “너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저 무녀의 세 치 혀에 현혹된 것이더냐.” “그런 것은 아니오나, 어차피 아직은 살려두시기로 정하셨잖습니까. ...
18. 코끝이 시릴 정도로 아직 기온은 차가웠으나, 춘기가 다가오고 있긴 한 모양이다. 잘 닦아놓은 것 마냥, 하늘이 맑다. 유담은 조기부터 해문의 가옥에서 일하는 윤씨를 따라나섰다. 오늘 청나라에서 물건을 실은 배가 온다고 한 날이기 때문이다. 포구(浦口:항구)에 도착하니, 칼날처럼 예리한 바람이 살갗에 내리꽂히는 듯했다. 차가운 것을 넘어서 아프기까지 ...
17. 사혁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뜨거운 숨과 함께 헛소리를 뱉어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이랑을 내려다봤다. 뜨근해진 이마 위의 천을 거뒀다. 이윽고 옆에 놓여 있는 놋대야의 찬물에 담근 뒤 쥐어짜고는 다시 이랑의 이마 위에 올려주었다. 유담의 아우라 했다. 유담은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면 아우에 대한 것도 종종 이야기하곤 했었다. 아우에 대한...
16. 해문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 올려 마른세수를 했다. 이내 옅은 녹 빛이 도는 솔잎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쌉싸름한 솔잎향이 입안을 가득 메우며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린다. 솔잎주는 해문이 즐겨 마시는 술이다.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입안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이 좋아서였다....
15. 사혁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꼬박 사흘이 지나있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으로 괴로웠다. 그 사이 당연히 의원이 다녀갔을 터였다. 의원은 사혁이 미독을 섭취한 것 같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사혁에게 행수는 스스로 독을 먹은 것인지, 독이 든 술인지 모르고 마신 것인지 부터 물었다. 그날 사혁에게 주안상을 올린 여비(女婢:여자 종)는 아마...
제3장: 풍전등화(風前燈火) 14. 유담은 눈으로 천천히 제 몸을 훑어보는 해문이 아리송했다. 유곽에 드나드는 객 중에 남색을 밝히는 음탕한 사내의 눈빛과는 전혀 달랐다. 뭐랄까, 해문의 눈빛에선 욕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묘한 색기가 돌았다. 그래서인지, 해문의 시선이 제 몸을 훑어 내릴 때마다 소름이 솟아나 간지러움이 일었다. 짙은 눈썹 ...
13. 윤오는 어릴 적 헤어졌던 누이의 행방을 아직 찾지 못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여부조차 알 수가 없다. 화염 속을 뛰쳐나온 열한 살의 윤오는, 귀동냥해 들었던 늙은 검객 곽무현이란 자를 찾아 나섰다. 한때 최고의 검객이라 불리었던 그는, 무슨 사연인지 산속에 오두막을 짓고 식솔 하나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몇 달 만에 찾아낸 그는 매몰차게 윤오...
12. 유담은 무엇 하나 챙기지 못한 채 향옥관을 떠나야 했다. 사실 이곳에 자신의 것이라곤, 지금 가슴 안에 품고 있는 토끼털 가죽밖에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말이다. 사혁은 끝까지 유담을 붙잡아보려 했으나, 유담은 그런 사혁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부드러웠으나 단호했다. 더는 자신의 그 빌어먹을 존재 때문에 누구도 다치게 할 수 ...
11. 새벽부터 내린 눈은, 송이가 굵지는 않았으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제법 쌓여가고 있었다. 유담은 이른 시각부터 눈이 떠져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창호를 열었다. 어스름한 푸른 새벽이 서서히 걷혀가며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금세 찬 기온이 온몸을 휘감아온다. 유담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지만, 어째서인지 창호를 닫...
10. 내관을 시켜 향옥관의 사내 무희의 무도가 끝나고 불러오라 명하긴 하였으나, 사혁을 마주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한 것이 없었다. 허울에 지나지 않은, 이 화려하기만 한 연회를 즐길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사내 무희는 궁금했다. 사내가 무도를 한다니, 아니 사내도 무도를 할 수 있다니. 주한은 말을 떼기 시작한 어릴 때부터 필수적일...
9. 해문은 폭우에 무너질만한 약한 지반들을 단도리하고 굴 안으로 들어가 불을 피웠다. 잠시 후 탄이 굴에 들어왔다. 탄은 털에 머금은 빗물을 떨쳐내려 푸드득 몸을 털었다. 그리고 해문의 옆으로 와 얌전히 몸을 엎드린다. 해문은 그런 탄을 내려다보며 옅게 웃더니 미리 챙겨온 영견(領絹:수건)으로 탄의 털을 슥슥 문질러 물기를 닦아내 주었다. “상한 곳 없이...
8. 유담은 후두둑 쏟아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열려 있던 창호를 닫았다. 아침부터 하늘이 그물거리더니 기어코 비를 뿌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제법 굵은 것으로 보아 금세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유담은 사철 중에 특히나 겨울을 싫어한다. 게다가 겨울에 내리는 비는 더 싫어한다. 눈보다 비가 더 싫었다. 이제 더는 추위에 떨 일도 배를 곯을 일도 없지만. 역시나...
몽상가 夢想家 꿈을 꾸는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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